먼저 파르벤 기업을 설립할 당시부터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14년동안 파르벤 소속 연구원들은 화학과 의학 부문에서 노벨상을 네 개나 휩쓸었고 고무와 원유를 포함한 합성원료 제조업 최전선에서 특허를 독점했다.
파르벤 기업은 독일 내의 모든 회사를 따돌리고 전 세계 4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반면 당시에 히틀러는 독일이 패전한 이유가 장기전에 필요한 천연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집권 전에 독일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고, 파르벤 기업의 기술력은 히틀러에게 독일이 원유와 고무와 질산염을 수입하기 위해 더이상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했다.
이 때 히틀러의 나치를 파르벤 기업을 분리해 권력과 영향력을 와해해 버릴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고 대신 파르벤 기업을 나치화 했다. 그리고 독일의 나치당이 파르벤을 자신의 것인것처럼 다룰 때 파르벤 내의 수뇌부들은 점점 야망이 커졌다.
파르벤은 독일 나치가 점령한 국가에서 화학 산업을 분할해 가지고, 심지어 아직 점령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점령할 것으로 보이는 국가의 기업들까지도 어떻게 나누어 먹을지 미리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심지어 파르벤은 나치의 군수물자의 85퍼센트에 달하는 양을 파르벤 기업이 조달하는 역할까지 했다.
책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의 주인공인 카페시우스는 인물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카페시우스의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카페시우스의 조국인 독일은 그 무렵에 국가사회주의 열풍에 사로잡혔다.
국가사회주의는 유럽에서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싶은 루마니아 같은 위성국가에게 더 잘 먹혀들었다. 그 당시에 카페시우스는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카페시우스도 세계 2차 대전 속에서는 변하게 된다. 먼저 그는 나치 무장 친위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혈통을 증명했고 아내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 또한 숨겼다.
이렇게 나치의 목적에 잘 동조를 한 카페시우스는 자신이 따르던 나치가 이끌던 독일이 패망의 길로 향해가고 있자 카페시우스는 가장 끔찍하게 전리품들을 획득했다.
그 전리품은 바로 끔찍한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탈취한 금니와 수감자들의 소지품인 금화, 손목시계, 담뱃값, 보석류였고 탈취한 금은 골드바로 만들어 자신의 친척에게 보냈다.
나중에 골드바 덕분에 카페시우스가 나치 전범 재판에서 재판을 받을 때 실력좋은 변호사를 선임한 뒤 자신의 형량을 9년으로 줄이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카페시우스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까?
먼저 이런 일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3가지의 부류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부류는 파르벤 기업과 카페시우스과 같은 사례들을 거의 모두 잊은 사람들이다. 이 일들을 모두 잊은 사람들은 이 책의 서문을 저술한 랍비 에이브러햄 쿠퍼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나타낸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나치독일과 같은 일들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는 이 책의 서문을 저술한 랍비 에이브러햄 쿠퍼가 속해있는 나치 전범 추적기관인 시몬 비젠탈 센터가 속해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책의 주인공인 카페시우스와 파르벤과 같은 기업들과 나치 정권 아래에서 가해자들이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일을 한 번 겪었던 적이 있다. 바로 일제강점기 시대이다.
사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 후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에 대한 재판을 하려하고 법도 제정하고 위원회도 구성해서 친일파를 처단하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전쟁을 터져 전쟁의 여파로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무력화되고,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식민지 잔재 청산을 무산시켰다.
지금도 일본이 위안부 할머니들께 제대로 된 보상도 하지 않고 교과서에도 역사를 왜곡해서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일을 잊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잊은 자들을 깨우치고 결코 잊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편집/구성 = 김리원 기자